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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한국사11

[ 한국사 ] 조선후기 천주교 전파 과정 조선후기 천주교 전파 과정 서양 중세 특히 유럽을 풍미했던 가톨릭신앙은 신 중심, 내세주의, 보편성의 사상이 지배하던 서양 사상에서 르네상스기를 거쳐서 인간중심, 현세주의, 개별성의 사상이 시대 사조가 되는 근대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동요가 일으킵니다. 이것으로 종교적인 개별주의를 표방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유럽 가톨릭교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개신교 운동에 대해서 가톨릭교에서는 자체 개혁과 교세 회복을 위해서 반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교단이 예수회였는데, 1534년에 창립된 예수회는 교회 정화와 교세 확대를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선교를 위해서 해외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해외로 선교를 떠나는데 예수의 동방선교에 나선 프란치스.. 2020. 7. 11.
[ 한국사 ] 실학 실학 실학이란? 일반적으로 실학의 개념은 조선 후기의 현실문제를 형이상학적인 학풍에서 벗어나 실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의 결과로 등장하였고, 탈주자학, 근대성, 재야 지식인, 실용성, 중상, 중농 등의 키워드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실학 연구의 시작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나라를 빼앗긴 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에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망국의 원인을 찾고 희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 결과로 이들은 조선이 망한 책임을 조선의 지도이념이었던 주자학으로 돌리는 주자학 망국론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아울러서 조선 후기에 등장했던 학풍 가운데 긍정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들을 실학이라고 지칭하고 실학사상의 계승을 통해서 당대 처했던 난국에 대처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실학 .. 2020. 7. 11.
[ 한국사 ] 정조 정조 영조의 관심을 받은 정조의 어린 시절 정조가 어린 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있는데, 5~6살 즈음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글로 되어있는 것이 인상적이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어른스럽습니다. 영조는 보양청에 있는 단계에서부터 정조 왕세손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57년에 6살의 어린 원손을 불러 학습진도를 점검하였습니다. 정조가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의젓하고 뛰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조가 원손을 교육하는 데 있어 굉장히 신경 썼다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원손을 가르치는 남유용에게 특별히 신경쓸 것을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영조 34년에도 원손이 입시했을 때 영조가 소학을 외우게 했는데 이 때도 .. 2020. 7. 11.
[ 한국사 ] 소현세자와 강빈 소현세자와 강빈 소현세자 인조의 첫째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부인 세자빈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9년동안 생활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1637년 2월 8일 청나라 구왕을 따라 심양행을 갑니다. 심양에 도착한 초기에는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동관에 기거하게 됩니다. 5월부터 새로 지은 심양관소인 심관으로 옮겨가서 거처합니다. 1644년에 청나라의 화북지방 원정에 종군하고, 9년간 청나라에 있으면서 조선에 인조에게 문안하기 위해 1642년과 1644년에 서울을 다녀갑니다. 처음에는 감시가 심했지만, 차차 완화가 되어 6월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소현세자는 비록 인질로 잡혀온 것이지만,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세자로서의 신분을 인정해줬고,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생.. 2020. 7. 11.
[ 한국사 ]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의 세자 시절, 분조 광해군이 세자 시절 때,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고 광해군을 분조에 있게 하였습니다.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을 대비해서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작은 조정입니다. 광해군은 종묘사직을 받들고 평안도 맹산~양덕 그리고 황해도의 곡산을 거쳐서 강원도의 이천에 분조를 두고 여러 의병들과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상을 주기도 하고 여러 활동을 하였습니다.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달 만에 적병이 나와서 위험을 느끼게 되어, 다시 평안도 성천으로 가서 분조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후에 서울이 수복되고도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서 조선의 방위를 위해서 국무사를 설치했을 때도 거기에 대한 업무도 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2020. 7. 11.
[ 한국사 ]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기까지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기까지 국호의 결정이라는 것은 새 왕조가 직면하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호는 특정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대내외적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국호 결정 과정이 특별한 건 명나라가 개입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만족과 동의뿐 아니라 자국 안에서도 그 왕조의 독존적 위상과 가치가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건국 주체 세력들은 국호의 결정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과제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이러한 상황이 된 것과 국호가 정해진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368년부터 1388년까지 20년의 시간동안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 2020. 7. 11.
[ 한국사 ]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리고 호족연합정권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왕건 vs 궁예 계승의식1.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왕건은 꽤나 계승의식이 강했다. 평양이 폐허가 되었음에도 평양을 개척하려 했고, 북진정책을 통해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 했다. 2. 궁예의 고구려 계승의식 궁예는 계승의식이 흐릿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헀었지만 했던 행실을 보면 정치를 위한 당편이 아니었나 싶다. 정권 안정 후 국호를 바꾸고 개성을 떠나서 철원으로 환도했다. 자기자신에게 위대함 강조하는 방향으로 쏠리기도 했다.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렸했다. 태조 왕건의 계승의식이 드러난 부분을 살펴보자. 1. 고구려 옛 땅에 대한 관심.. 2020. 5. 21.
[ 한국사 ] 고려 건국의 과정, 태조 왕건 고려 건국의 과정, 태조 왕건 후백제와 후고구려1. 후백제 후백제는 견훤에 의해 설립되었다. 신라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분위기를 이용하여 멸망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며 892년 분립하였다. 견훤은 사회개혁의지는 부족하나, 군사적으로 고려나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오월이랑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2. 후고구려 궁예가 설립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고구려세력과 연합하고 901년에 국호를 고려, 후고구려라 사용하면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자신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국가기반이 어느정도 잡혔을 때, 후고구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904년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11년도에는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반신라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살았다. 궁예는 .. 2020. 5. 13.
[ 한국사 ] 백제의 마지막 공주: 태비 부여씨의 삶 백제의 마지막 공주: 태비 부여씨의 삶 660년 백제의 멸망. 그 후 나라를 잃은 백제의 유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의자왕과 그 아들이 웅진성으로 피난 갔지만 웅진성에서 붙잡혀 사비성으로 끌려가 당나라 군에게 바쳐졌다. 이 때 의자왕은 치욕적인 항복식을 하게 된다. 의자왕과 백제포로들은 낙양성에 끌려가게 된다. 고종 앞에서 사면을 받고, 의자왕은 곧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은 웅진도독이 되어서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거나 백제 유민들을 안정화시키는 일을 맡았다. 오늘 알아볼 사람은 백제의 한 여성이다.2004년도에 이옹과 부여태비의 묘가 발견되었다. 부여융 백제 이후에 족보를 탐색할 수 있는 단서가 묘지명을 통해 발굴되었다.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융의 손녀이다. 부여 태비의 첫째 아들이 양섭이라는 사람.. 2020. 5. 12.
[ 한국사 ] 남북국 시대에 대한 의견 최초의 통일국가는 신라? 고려? 고려가 건국되기 전 통일신라에 있었던 견훤, 궁예가 후백제, 후고구려를 선포했다. 이 점은 이미 그들은 백제, 고구려와 대비되는 신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신라에 반기를 들 때 후백제, 후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미 통일신라에 살고 있었고, 신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된 고려는 통일된 상태로 유지된 국가를 이어서 건국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통일국가를 고려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다.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을까? 의견1. 발해는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고, 관습이나 문화적 측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면서도 발해의 고유문화를 형성함.- 발해국왕은 자신을 고구려국왕.. 2020. 4. 28.
[ 한국사 ] 신라 통일에 대한 의견들 1.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긍정측 - 불완전하게 분열되어 있던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였다. - 삼한일통(일통삼한) 이라는 민족정신이 있었다. -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했지만, 통일 이후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노력을 했다. 부정측 - 영토통합에서 고구려의 영토는 적게 포함되었다.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통합전쟁론) 북한학계 - 남한: "통일신라와 발해", 북한: "발해 및 후기신라". - 북한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라고 본다. 2. 신라의 "삼한일통"이라는 민족정신으로 삼국을 통일하였다. Q) 먼저 신라는 언제부터 삼한일통이라는 말을 썼는지 알아보자. 통일전? 후? 1. 통일 전에 생겼다는 의견 - 긍정측 - 김유신 자신이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 2020.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