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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한국사

[ 한국사 ]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기까지

by 신인용 202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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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기까지

 

 국호의 결정이라는 것은 새 왕조가 직면하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호는 특정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대내외적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국호 결정 과정이 특별한 건 명나라가 개입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만족과 동의뿐 아니라 자국 안에서도 그 왕조의 독존적 위상과 가치가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건국 주체 세력들은 국호의 결정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과제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이러한 상황이 된 것과 국호가 정해진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368년부터 1388년까지 20년의 시간동안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마국이었던 조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명과 원은 고려를 필요로 했고, 명과 원 사이에 교려가 끼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원땅을 내주고 밀려났던 북원의 입장에서는 고려는 중원을 되찾기 위해 군사적이나 정치적으로 꼭 필요한 동맹대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명나라 입장에서는 원과 고려가 결합해서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은 막아야 했습니다.

 명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가졌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명나라 사신이 살해되는 일이 벌어져 명과 고려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반면 북원은 우왕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해주기도 하고 그 시기에 원나라가 고려에 사람을 보내는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 때 명나라 홍무제는 우왕을 고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정벌하려는 위협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북원과 고려의 관계가 더 긴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1381년에 명나라는 원나라의 황족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일으켰고, 이 원정으로 명나라는 한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였고, 1382년 명나라는 이 황족의 세력들을 고려의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고려가 명나라의 위엄을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1388년에 북원은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으로 북원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되었고, 조선은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고려조정은 최영을 중심으로 한 정국이 운영되고 있었고, 우왕과 최영은 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명나라의 홍무제의 연호를 정지하고 원나라 복식인 호복을 입게 하면서, 명나라와의 대립관계에 들어갑니다.

명나라에서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입장을 내보였는데, 이것은 예전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라는 것을 설치하고 그 영토를 가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려는 더 이상 공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였고, 이렇게 명나라와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려 했습니다. 반대 여론이 있었음에도 요동정벌을 출정하였고, 이 때 이성계가 요동정벌의 출정길에 올랐습니다. 이성계는 이 정벌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출정길에 올라서도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황이라며 회군을 하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고, 이성계는 끝까지 군사를 이끌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사를 돌려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위화도회군입니다.

 이렇게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고, 고려의 정치적 상황과 대명 외교방향이 크게 바뀌게 됩니다. 새 왕조 조선의 건국은 이런 변화의 최종 결과물이고, 그러함과 동시에 명나라에 대한 사대론의 성격이 규정되는 첫 번째 단계가 되었습니다. 이성계의 4가기 불가론에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말이 대명사대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화도회군을 하면서 명나라와의 충돌에 대한 위험이 사라졌고, 명나라는 군사를 동원해야 하는 부담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동과 여진을 둘러싼 고려와 명의 긴장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ᄋᆞᆻ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와의 관계에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홍무 연호를 다시 복구하고 몽고풍의 호복의 착용을 금지시켰습니다. 고려왕실을 수호하려던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13927월에 이성계는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국왕에 등극하게 되면서 고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에게는 직위 직후부터 명나라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자기가 수립한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라도 국호가 명나라가 스스로 정해주게끔 여러 조건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국호를 정해주게 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새 왕조의 사대적 자세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목할 점은 새 왕조가 올린 국호의 후보가 조선과 화령이었습니다. 화령이라는 칭호는 이성계의 왕업이 일어났던 곳의 이름을 딴 것이나 선택되지 않았고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졌습니다.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은 태조즉위 직후에 조박이 상서한 내용 안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박은 새 왕조의 제사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것을 아뢰면서, 고려에서 전해지고 있는 여러 제사들을 따를 수 없고 모두 없앨 것을 주장합니다. 조박이 새 왕조에서 마땅히 새롭게 마련해야 할 제사의 대상으로 특정 왕들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새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된 역사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태조를 비롯한 고려의 몇몇 임금들을 제사하는 대상으로 삼았는데 고려의 멸망을 공식화하면서도 삼한의 통합, 외침의 극복, 유교 문물의 정비, 정란의 종식과 같은 고려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는 이어받을 가치가 있다는 새 왕조의 역사인식을 승리한 국가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감을 함께 드러냈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 제사 가운데 기자에 대한 제사는 명시가 되어 있는데 단군에 대한 제사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을 때 새 왕조 개창 직후에 조박이 드러낸 언급은 보다 공식적인 역사적 존재로써 단군을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시대 이래 전승되었던 단군에 대한 인식이 새 나라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계기와 새 왕조 건국주체들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결합성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 왕조는 유교적 교화의 상징인 기자의 역사적 계승을 굉장히 강조하였습니다. 조박은 기자에 대한 강화된 역사인식을 단군에 대한 인식을 함께 드러내었습니다. 따라서 새 왕조가 국호로써 조선을 선택했을 때 동방에서 처음 나라를 연 가장 오래된 존재의 계승자라는 위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유교적인 교화를 상징하는 존재의 계승자라는 위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건국의 주체들에게 단군과 기자들은 전혀 상충하지 않고, 각각의 개별적인 위상을 통해서 새 왕조의 가치를 함께 높여줄 수 있는 공동 역할 분담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홍무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택해주었고, 조선이라는 국호는 각자의 맥락에서 선택되었지만 새 왕조와 명나라 모두 현실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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