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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한국사

[ 한국사 ]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by 신인용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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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리고 호족연합정권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왕건 vs 궁예 계승의식

1.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왕건은 꽤나 계승의식이 강했다. 평양이 폐허가 되었음에도 평양을 개척하려 했고, 북진정책을 통해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 했다.

 

2. 궁예의 고구려 계승의식

 궁예는 계승의식이 흐릿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헀었지만 했던 행실을 보면 정치를 위한 당편이 아니었나 싶다. 정권 안정 후 국호를 바꾸고 개성을 떠나서 철원으로 환도했다. 자기자신에게 위대함 강조하는 방향으로 쏠리기도 했다.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렸했다. 태조 왕건의 계승의식이 드러난 부분을 살펴보자.

 

1. 고구려 옛 땅에 대한 관심

 태조가 즉위하던 해 9월에 군신에게 평양에 대한 관심을 아래와 같이 표하였다.

 " 평양 옛 서울이 황폐되어 비록 오래 지났더라도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

 평양 옛 서울이라면서 고구려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이 고구려와 고려가 단절되지 않았고, 서로 같은 나라임을 인지하고 말한 것이다.

 

- 태조 왕건은 평양을 대도읍으로 삼고 지키게 하고, 자기 세력기반에 있던 민가들을 평양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왕이 방문하는 것은 거대한 관심인데, 태조 왕건은 해마다 방문하였다.

- 또 당시 남방에서 신라포섭작업을 하고 후백제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임에도, 태조는 서경개척운동을 전개했다.

- 후대에게도 평양을 소중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2. 발해 유민에 대한 예우와 거란에 대한 증오감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후대하였다.

 

-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었을 때, 왕족과 관료들,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층이 남하했는데 이들을 후대해주었다.

- 태조 17년 발해의 세자인 대광현이 수만의 백성들을 데리고 내려왔을 때도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주고 관품을 주어서 발해의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해주었다.

-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에게는 엄청난 증오감을 나타내었다.

 

 만부교의 낙타사건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에게는 엄청난 증오감을 나타내었다. 만부교의 낙타사건으로 알 수 있다.

 거란이 낙타 50필을 보냈는데 태조 왕건은 이를 거절하고, 거란과 북교를 단절하고 사신을 귀향시키고 낙타는 굶어죽게 하였다. (낙타는 무슨 죄...ㅠ)

 

 

 

 

 

호족연합정권설에 대한 의견

 호족연합정권설이란?

고려 왕실은 호족의 협조 없이는 유지가 어려웠을 만큼 호족의 힘이 강했다는 주장.

 

 이에 대해선 찬반의견이 나뉜다.

 

1. 찬성측. 고려 왕실은 호족의 협조 없이는 유지가 어려웠다.

 호족은 독자적인 세력과 힘을 가지고 있고, 후삼국 시대에도 이들을 바탕으로 돌아갔다. 고려의 건국에 있어서도 호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족들은 그 지역에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불리면서 이 지역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며 군사도 가지고 있었다. 관부도 따로 설치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래서 태조왕건이 이들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다.

 => 호족과의 관계에서 태조대의 왕권은 미약했다는 것.

 

 

 태조왕건 당시 정치형태에서 호족과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1) 호족들이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태조왕건이 호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말을 겸손하는 자세를 보였고, 이러한 태도에 귀부한 사람이 많았다고 본다. 고려 왕조는 지방 호족들과 호의적인 관계인 것도 알 수 있다.

 

2) 태조의 혼인정책

 태조왕건은 29명의 부인을 거느렸다. 각 지역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결속을 굳게 맺으려고 했다. 부인이 낳은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들을 근친혼 시키면서 세력이 분열되는 것을 막았다. 호족세력들을 왕실주변에 묶어두려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 29명의 후비를 둔 것은 호족들과의 결합을 위한 정책이라는 것.

 

3)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

- 기인제도 : 향미 자제를 뽑아서 서울에 볼모로 삼고 출신지의 일에 대해 고문에 대비한 것.

 이 제도는 국왕이 일방적으로 호족자제를 서울로 올려보낼 수 없었다고 본다. 서울에 오히려 호족이 자진해서 자제를 중앙에 보내서 자기세력이 중앙하고 연결되었음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어떤일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보냈다고도 한다.

 (이 제도는 태조도 중앙에서 올라온 자제에게 잘해주면서 호족과 태조의 쌍방호의적인 제도였다.)

- 사심관제도 :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했을 때, 경순왕을 경주지역에 사심으로 삼아서 여러 일들을 맡아보게 한 것에 바탕을 둔 제도.

 

 

 이러한 제도들은 중앙행정력이 지방에 침투될 수 없다고 판단해 호족세력을 통제하려고 시행됐던 것이었다. 즉,

 "태조 왕건은 수도에 거주하는 지배계층을 매개로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2. 반대측. 태조 왕건이 호족세력보다 미약하지 않았다.

1) 호족들이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태조대에 있어 귀부한다는 것은 인질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개경에 인질을 두는 상태는 한편으로는 왕권의 확인, 지방세력의 견제로써 국왕의 필요에 의해서 호족에게 강요된 것이다.

 다른 면으로는 호족이 국왕의 신하로 복섭되면서 고려라는 국가체제 보호를 받으며 국가권력을 후광으로 삼아서 호족을은 지방에서 안정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 귀부한 것이다.

 => 귀부한 것은 국왕과의 군신적 상하관계가 성립함을 뜻한다.

 

2) 태조의 혼인정책

 전국각지의 주요호족세력들과 결속하기 위한 정약결혼이라는 주장에 문제가 있다. 후비들의 출신지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29명의 후비 중 출신지역을 알 수 있는 26명을 조사해보면,

 고려 11개 지역에 18명, 후백제 2개 지역에 2명, 신라 4개 지역에 6명이다.

고려지역 출신 호족들이 결혼을 맺기에 유리했다고 본다. 고려지역 호족들은 궁예때부터 상경해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거나, 일찍부터 귀부해서 태조의 측근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본다.

 후비들 중 한 가문에서 두세명이 나오기도 했다

 => 태조가 의도적으로 정약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태조의 필요보다는 왕비들의 아버지가 중앙에 측근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에서의 기반을 다지려는 그들의 의도가 근본적인 이유이다.

 

 사례)

 실제로 장화왕후 나주 오씨에게서는 왕건이 후사를 보지 않으려 했고,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태조와 혼인했음에도 태조가 찾아오지 않아 여승이 되었다.

 

 => 혼인정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호족들이 중앙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왕실과의 통혼을 원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3)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

이 제도도 상하관계를 맺는 것이다. 국왕은 여러가지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당사자이고, 인질을 보내는 사람은 하위자로써 피등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왕은 이러한 호족들을 군신관계 하에 지배하면서 그 지방의 지배를 임시적으로 위임한 것이다.

 

4) 호족들을 벌주거나 제재를 가했다.

 태조는 자기에게 귀부하거나 협조하는 호족의 근거지는 승격시켜 주었고, 반면에 반항하거나 패배했던 근거지는 강등시킨 사례가 있었다.

 

5) 호족들에게 고려식의 관계를 수여해주었다.

 고려식의 관계를 받았다는 것은 국왕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태조는 중앙이나 지방에 있는 호족들에게 고려식의 관계를 수여해주었다. 호족들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태조정권의 합법적인 신료가 된 것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국가의 공식질서 안에 편입시키고 지방통제권을 잠시 수여한 것으로 본다.

 

 

 

 

 

 

장화왕후 오씨 (버드나무 잎 이야기)

 태조왕건의 수많은 왕비 중 한명으로, 호족집안의 딸이었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나주지역으로 갔다가 목이 말라서 우물으로 갔다가 오씨가 체하지 말라고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떠서 물을 떠주었다. 왕건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청혼하게 되었다.

 장화왕후 오씨는 신분이 낮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오씨가 다른 왕비에 비해서 신분이 낮았다고도 보고, 오씨의 부친이 다른 호족들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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