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공주: 태비 부여씨의 삶
660년 백제의 멸망. 그 후 나라를 잃은 백제의 유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의자왕과 그 아들이 웅진성으로 피난 갔지만 웅진성에서 붙잡혀 사비성으로 끌려가 당나라 군에게 바쳐졌다. 이 때 의자왕은 치욕적인 항복식을 하게 된다. 의자왕과 백제포로들은 낙양성에 끌려가게 된다. 고종 앞에서 사면을 받고, 의자왕은 곧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은 웅진도독이 되어서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거나 백제 유민들을 안정화시키는 일을 맡았다.
오늘 알아볼 사람은 백제의 한 여성이다.
2004년도에 이옹과 부여태비의 묘가 발견되었다. 부여융 백제 이후에 족보를 탐색할 수 있는 단서가 묘지명을 통해 발굴되었다.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융의 손녀이다. 부여 태비의 첫째 아들이 양섭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지었다고 한다.
부여 태비는 누구인가??
의자왕에게 이어지는 직계 왕실자손이다.
의자왕 - 부여융 - 부여문사 까지가 전부였는데, 태비의 묘가 발견되면서 부여융에게 다른 아들 부여덕장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부여덕장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여 태비에 대해 알아보자.
690년 부여덕장의 둘째 딸로 출생. (부여융의 손녀, 의자왕의 증소녀)
711년 당 고조의 증손자 이옹의 두번째 부인으로 혼인
718년 '곽왕비'에 책봉
727년 괵왕 이옹 사망.
태비 부여씨가 낳은 장남 이거가 괵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4년 뒤 태비로 책봉
738년 49살로 사망하여 이옹과 합장
"남국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날의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는데 아침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내지 않았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
- 태비 부여씨의 묘지명
어질고 아름다운 덕을 가지고 있고,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예화를 갖추고 있어 군자집안 사람이라고 할만해서 황족의 대필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측천무후 사망과 당 중종의 복위, 그리고 이옹
우선 태비부여씨가 태어난 690년 즈음의 상황을 알아보자. 당나라의 690년은 엄청 복잡한 시기였다.
당나라에 황제 고종이 승하한 후에 고종의 황후로 있었던 측천무후는 자기 아들들을 차례로 왕위에 올렸다. 고종이 죽고 나서 황제에 오른 건 중종이다. 중종의 황후였던 위씨가 세력이 강했다. 위씨의 아버지가 실권을 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측천무후는 이를 알고 중종을 폐위하고, 넷째아들 이단을 다음황제로 예종으로 올렸다. 이에 여러 지역이 측천무후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측천무후는 이런 반대파를 진압했다. 그리고 690년에 스스로 중국 최초로 유일하게 여성 황제로 올라섰다.
이후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측천무후가 폐위시켰던 중종이 다시 복위하는데 이 때 이옹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측천무후가 죽고 그 측근세력들이 추출될 때 이옹이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이옹은 중종의 황후였던 위씨. 위황후의 여동생 숭국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위황후 세력이 엄청나게 커지는데, 이 과정에서 남편인 중종을 독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황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노린 것이다. 이것을 보다못한 예종의 셋째아들 이융기가 토벌하게 된다. 위황후 일족을 토벌하고 아버지 예종을 다시 복위시킴으로써 정세가 뒤집히게 된다.
이 때 이옹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자기 부인. 숭국부인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쳐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렇게 이옹은 돌싱이 되었는데, 이 다음에 부인이 된 게 부여 태비이다. 묘지명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태비부여씨가 이옹과 결혼하고 집안을 일으켰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부여씨가 이옹과 결혼하고, 자신은 바로 왕비가 되지 못했다. 이옹이 개광이 된 7년 후에 개광비로 책봉되었다. 이옹이 죽고, 이옹 아들이 자리를 넘겨받았을 때 태비부여씨는 자기아들이 왕이 되는 거니까 태비가 되어야 하는데, 부여씨의 첫 아들인 이거가 왕이 되고도 바로 태비로 책봉되지 못하고 4년 후에 책봉되었다.
의자왕의 자손들
측천무후 시대에 돌궐족의 목철이 약탈을 자처하고 다녀서, 정부에서 손쓰기 힘든 상황이 있었다. 측천무후가 목철을 잡으면 왕으로 삼고 상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목철은 당나라 군대가 와도 손을 못쓰는 상대였다. 이 전투에 파병되었던 당나라 군대 일원으로 부여문선이 있었다. 백제왕족의 성씨인 부여씨를 가진 문선이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백제왕족이 당나라에서 무장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듯이, 부여융의 아들 부여문사가 있다. 이름이 비슷한 걸로 보아 형제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들로 부여문사, 부여문선 모두 부여융의 아들이라고 추측된다. 최소 부여씨니까 백제왕족의 후손이다.
부여태비의 아버지 부여덕장. 부여덕장의 아버지는 부여융. 부여융한테는 2명 내지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일정한 입지를 가지고 존속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여태비의 자매가 있었는데 태비는 다섯 아들을 두었다. 다섯 아들은 또 몇몇의 아들을 두었다.
부여씨. 백제왕족이 당나라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부여태비의 삶은 먼 타국에서도 정체성을 가지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라간 왕족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잡동사니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사 ]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지기까지 (1) | 2020.07.11 |
---|---|
[ 한국사 ]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 (0) | 2020.05.21 |
[ 한국사 ] 고려 건국의 과정, 태조 왕건 (0) | 2020.05.13 |
[ 한국사 ] 남북국 시대에 대한 의견 (0) | 2020.04.28 |
[ 한국사 ] 신라 통일에 대한 의견들 (0) | 2020.04.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