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의 과정, 태조 왕건
후백제와 후고구려
1. 후백제
후백제는 견훤에 의해 설립되었다. 신라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분위기를 이용하여 멸망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며 892년 분립하였다.
견훤은 사회개혁의지는 부족하나, 군사적으로 고려나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오월이랑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2. 후고구려
궁예가 설립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고구려세력과 연합하고 901년에 국호를 고려, 후고구려라 사용하면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자신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국가기반이 어느정도 잡혔을 때, 후고구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904년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11년도에는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반신라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살았다. 궁예는 기행도 많이 보여주었다.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했다. 어딘가 행차할 때 승복, 머리에 금색을 쓰고, 외출할 때마다 비단으로 튜닝된 백마를 탔다. 자신을 과시하는 노력을 했다.
말기에는 굉장히 포악해졌다. 의심증이 심해졌을 때는 왕비였던 강씨가 간통했다고 몰아붙이혀 부인과 두 아들을 죽였다. 또 자기는 남들의 마음을 보는 관심법을 쓸 수 있다면서 주변인이나 백성들한테 반역죄를 씌어 죽였다.
궁예가 하루에 죽이는 사람이 1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다가 이러한 표방목표를 버린 이후에 반대세력과의 대립이 심해졌기 떄문에 이런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궁예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궁예의 사치와 낭비로 말미암아 세금이 과중하게 되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은 정치적 지위나 군사경제적 기반으로 신뢰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궁예와 대립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 나주지역에 가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게 되었다. 궁예는 이에 위협을 느껴 왕건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했다. 관심법 등으로 반역죄로 몰아 사람들을 죽여갔다. 궁예의 폭정을 못 견뎌 마침내 918년에 왕건을 추대하며 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서울을 자신의 본거지였던 개성쪽 송학쪽으로 옮겨서 자신의 정치군사적 기반을 다져갔다.
왕건의 집안
송학지방출신의 호족출신.
왕건이 개성주위에 설치되어 있던 군진에서 활동을 해서 무력을 배경으로 사회진출을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보다는 왕건의 기초적인 힘은 경제력이다.
왕건의 선조 중에서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전개해서 성공을 거두었던 사람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었다. 해외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개성일대에서 최대호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방 뿐만 아니라 해적을 소탕하여 해상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는 상당한 군사력도 구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손자인 왕건까지 이를 잘 유지했다.
궁예의 세력이 등장했을 떄,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쳤다. 아직 용건부자가 가진 군사력이 궁예보다 약해서 이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가지고 있던 해상활동으로 주도권을 잡던 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일단 귀부하였다.
한편으로는 용건부자가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고 평화를 이륙하기 위해선 궁예의 세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어서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는 움직임이 잘 보였었다.
후삼국의 통일과 고려 건국
왕건의 고려건국 초기에 혼잡했었다. 호족세력을 포섭해야만 했고, 후백제로 세력이 기울어진 것을 경계했어야 했다.
1) 궁예 평정과 고려건국
- 내부 세력에서 왕위를 넘보는 반혁명세력 발생할 뻔
- 궁예가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청주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저항
- 대호족 순식이라는 사람이 왕건에 대해 비협조적 태도를 보임
=> 호족 세력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동요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가 직위한 원년에 자신의 직위로 각 지역에서 정변이 일어날 것이 염려되니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호족세력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의를 다져줄 것을 당부하였다.
=> 당시에 위태롭고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후백제의 지역하고 근접한 곳을 더 심했다. 후백제와 내통하거나 후백제로 귀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왕건은 호족 포섭정책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명주지역 호족, 순식을 계속 신경 썼다.
순식은 진골출신으로 신라말기에 명주에 내려와서 군사권과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사람이다.
2) 신라 병합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태조 7년에 견훤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예전보다 신라에 친하게 다가가는 노력을 했다. 신라판도 안에서의 지방세력에게서 신임을 얻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조 3년에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친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뒤에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는데 신라가 태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태조는 군사를 보낸준 것에 대해서 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조 10년에 견훤이 영천을 거쳐 경주를 기습하였다. 이 때 견훤이 여러 만행을 하여 고려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태조 13년에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서 만나자고 헀는데, 딱 기병 50명만 거느리고 경주에 방문하고, 가서 위로하고, 친근하게 다가갔다.
태조 18년에 신라 민심이 고려고 기울고, 여러 성주가 고려에 항복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마침내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청했다. 왕건은 예를 갖춰서 맞이하고,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고, 1천석씩 녹도 주었다. 집도 지어주었다. 신라는 경주라는 이름으로 두고 경순왕을 거주하게 하였다. 신라가 존속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 때를 계기로 992년을 유지해 온 신라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3) 후백제 멸망
후백제도 붕괴의 징조가 있었다. 후백제를 고립시키는 왕건의 친신라 정책과 호족 포섭책은 마침내 대세를 고려에 기울게 하였다. 후백제 내부에 동요를 가져오게 하였다.
호족들은 매번 바뀌는 삼국 간의 세력판도에 대해서 자기세력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고려나 후백제 또는 신라에 가담했다. 특히 예전 신라호족들은 고려와 후백제가 대립할 때, 견훤의 무력세력을 배척하고 평화를 표방했던 태조 왕건을 지지하면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후백제 내부의 정세는 되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태조 18년 견훤의 첫째아들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견이 있다.
- 의견 1) 견훤이 넷째아들 금강을 편애해서 왕위를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기 때문에 신검이 양검, 용검과 모의해서 일으킨 것이다.
- 의견 2) 견훤이 고려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에 비해 신검은 고려에 대해 강격책을 유지하려 했다. 두 사람의 의견차이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해 왕건에게 귀부하였고, 왕건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후삼국 시대의 종료
왕건은 신검이 남아있는 후백제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87500명이었는데 당시 후백제가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신검은 항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건은 신검을 불러 견훤을 유폐시킨 능환을 꾸짖었다.
이렇게 태조 왕건은 전장에서 40년동안 말을 달리다가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한국사상 최대의 내란기라고 보기도 하는 후삼국시대가 50년 만에 수습되고 새로운 통일왕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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