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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한국사

[ 한국사 ] 광해군의 업적

by 신인용 202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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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의 세자 시절, 분조

 광해군이 세자 시절 때,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고 광해군을 분조에 있게 하였습니다.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을 대비해서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작은 조정입니다. 광해군은 종묘사직을 받들고 평안도 맹산~양덕 그리고 황해도의 곡산을 거쳐서 강원도의 이천에 분조를 두고 여러 의병들과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상을 주기도 하고 여러 활동을 하였습니다.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달 만에 적병이 나와서 위험을 느끼게 되어, 다시 평안도 성천으로 가서 분조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후에 서울이 수복되고도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서 조선의 방위를 위해서 국무사를 설치했을 때도 거기에 대한 업무도 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여러 활동을 전개합니다. 임진왜란에서 광해군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분조를 탁월하게 이끌어서 민심을 잘 붙잡았습니다.

 

 

광해군의 직위 직후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시대는 피폐 그 자체였습니다. 광해군은 직위 이후에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해서 죽지 않게 돕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란으로 불탄 책들을 수습하고 새로 간행하는 일에도 노력하였습니다. 수습한 책을 가져다 바치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도 했고,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에게 거금을 주고 책을 사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고려사나 용비어천가 같은 책을 복원했고 사신들을 통해서는 중국 역사서나 유교경전들을 구매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료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사골을 지어서 여러 국가 기관에서 만든 기록물을 실록과 함께 보관하였습니다. 새로 발간된 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동의보감 편찬입니다. 허준은 선조가 돌아가실 때 손을 못 썼다는 이유로 귀향을 가있었습니다. 광해군은 허준을 도성에 출입하게 해주고 내의원에 있는 의서를 볼 수 있게 하며 동의보감 완성에 조력해 주었습니다.

 

 

궁궐 건축

 하지만 광해군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계속해서 궁궐을 짓는데 집착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창덕궁이 다 지어지고 창덕궁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어려운 나라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창경궁을 지으라 했고 동의문 안에 경덕궁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빈의 아들 정원군의 집이 있었던 인왕산 부근에 왕귀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인경궁을 지었고, 북학이 있던 자리에 자수궁을 지었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기 위한 시각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광해군의 궁궐 건축은 어려운 상황에서 벌인 폭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동법

 광해군 시절에 가장 폐단이 심했던 공납제를 대동법을 통해 개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의견이 둘로 나뉩니다.

 우선 대동법이 광해군의 업적 중 하나라는 의견입니다. 광해군 때에 경기도 내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던 것은 광해군의 양보가 따랐던 것이기에 광해군의 업적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입장은 대동법 시행은 이원익의 적극적인 태도와 추진력에 힘입은 것이지, 광해군은 오히려 대동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 내었다는 것입니다. 실록 곳곳에 보이는 광해군의 목소리를 본다면 다른 지역에 대해 대동법을 더 이상 확대하기 원치 않았고 오히려 과거의 공납제도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심하전투, 긍정? 부정?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 후금의 세력은 강성해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광해군은 기미책을 썼습니다.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를 하되 충돌을 피하는 소극적인 방식의 정책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또다시 무력충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가 후금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명나라는 도움을 요청하면서 임진왜란 시기에 거의 멸망하기 전에 도와서 살린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처음엔 거절하였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하게 됩니다.

 외교전략과 중국어에 능통한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해서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명나라의 의견에 다 따르지 말고 오직 패배하지 않는 전투만 하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지역에서 대패하였고,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후금에 항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지에서 상황을 보고 행동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입니다. 광해군 11년에 후금에서 온 국서에서도 원하던 파병이 아니라는 광해군의 뜻이 후금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항복하면서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었었지만 후금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광해군에게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이 심하전투에 대한 의견이 나뉩니다. 우선 긍정적 입장은 어려운 조선상황을 헤아려서 조선의 큰 손실을 막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홍립을 보내서 적절하게 싸우다가 항복하게 해서 군사적 손실을 막고 큰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홍립이 후금의 포로로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후금의 상황을 보고했던 것이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 주었습니다. 심하전투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었다는 분수령이 될 정도로 명나라를 기울게 한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투에서 전력손실을 최소화했다는 것은 광해군의 판단력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심하전투에서는 별다른 이익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강홍립은 후금에서 포로로서 정보전달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군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사한 군사는 13000명에 9000명이고, 조선 군사는 후금의 노동력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침략의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광해군이 후금 정책에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지에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광해군 정국은 여러 옥사가 벌어지면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대동법은 흐지부지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궁궐은 계속해서 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상황을 통치할 여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기미책으로 소극적인 태도로 무마하려 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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