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강빈
소현세자
인조의 첫째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부인 세자빈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9년동안 생활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1637년 2월 8일 청나라 구왕을 따라 심양행을 갑니다. 심양에 도착한 초기에는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동관에 기거하게 됩니다. 5월부터 새로 지은 심양관소인 심관으로 옮겨가서 거처합니다. 1644년에 청나라의 화북지방 원정에 종군하고, 9년간 청나라에 있으면서 조선에 인조에게 문안하기 위해 1642년과 1644년에 서울을 다녀갑니다.
처음에는 감시가 심했지만, 차차 완화가 되어 6월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소현세자는 비록 인질로 잡혀온 것이지만,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세자로서의 신분을 인정해줬고,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서 소현세자를 잘 대해주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심양관소에서의 생활은 인조에게 상당히 불만이었습니다. 세자로서 학문적 소양은 소홀히 하고 사냥이나 무예 등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조는 심양으로의 경비와 물자 조달에 견디다 못해 그것을 거부하거나 책망하였습니다. 멀리서 전해지는 풍문에 의해서는 간혹 위험한 음모로 보이는 일들도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심봉내시들을 심양에 파견하여 세자를 감시하고 탐문하기도 합니다. 소현세자가 팔왕을 비롯한 여러 제후 왕들과 용골대 마부대 같은 청나라 장수들과 사교를 쌓는데 많은 물자가 소요됩니다. 인질로 잡혀가 있는 몸이지만 현대관점에서는 해외연수 갔던 꼴입니다. 그 곳에서의 유명인사들과 관계를 맺고 생활을 하는데 비용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조선에 가져온 많은 비단과 금품이 말썽이 됩니다. 조정에서는 이 재정 중의 일부를 조선의 재정관리 부서인 호조에 넣으라고 합니다. 이 때 호조에 넣었던 재물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거주할 때 같이 거주했던 인원들이 증가했고 조선 왕세자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을 치장하고 확장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을 두고 조선에서는 건물을 넓히고 사적으로 재화를 증식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정부의 시각입니다.
심양에서의 경영과 무역활동은 세자빈 강씨, 즉 강빈이 주도한 것처럼 알려져서 질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강빈은 많은 비단과 금은보화를 구입하고 비축했습니다. 심관에서 이루어졌던 정무에도 관여하여서 정부문서를 검열하기도 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강빈의 태도에 대해 소현세자의 성격이 유순하고 인정이 많아서 강빈을 휘어잡지 못하고 끌려다녔다고 효종실록에 적혀있습니다.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못마땅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시각으론 강빈은 상당히 주도적인 성격으로 보입니다. 외국 땅에서 생존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어진 것을 잘 운용해서 경제적인 이익까지 도모했던 한 여성 리더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세자빈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데 더욱이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으로부터 전쟁 수행을 위한 막대한 물자를 징발했고, 이러한 요구는 심관에 있는 소현세자를 통해서 요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형세는 조선 본국으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소현세자가 더 나쁘게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양에 잡혀있던 반청세력들에 대한 처우, 조선 포로들의 도망 등에 대한 현황에 대해 소현세자가 선처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소현세자의 모습은 조선 본국의 입장에서 물자를 낭비하고 무능력하기 그지없고 인조에게 미움을 사기까지 했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생활을 하면서 인조의 미움을 받는데 하나는 분수에 넘는 행동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래 조선의 왕세자 역할은 왕에 대해 규칙적으로 문안하는 것, 왕의 음식물과 약물 등을 살피는 것, 시강원에서 공부하는 것 정도입니다. 국정에 대한 관여는 없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있었던 소현세자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청나라의 왕자들은 정치군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고,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온 왕세자에게 그런 역할들을 기대했고 수행해주길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거주하는 심관은 임진왜란 시기에 광해군이 맡았던 작은 조정인 분조와 같은 체제와 기능을 가진 양상을 띄게 됩니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조선의 왕세자가 관여한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웬만한 일들을 인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나중에 조선에 알려져 물의를 빚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반목이 소현세자를 의문으로 몰게 했고, 강빈과 아들들까지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에 소현세자의 아들들의 계승권이 박탈되는 것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1644년 2월 18일에 서울로 귀환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온 지 두달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의관들은 학질이라고 진단했는데, 인조는 당시에 과실이 있었던 인물들을 질책하거나 처벌하지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장례를 소박하게 해서 대신들이 지적하기도 했지만 인조는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승정원 일기에 병상일지가 있는데 23일에 증상이 심해졌을 때 청심원을 복용시켰는데 청심원은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구급약이었습니다. 학질에 대한 처방이었다기 보단 인사불성에 대한 구급약으로써 처방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에게는 학질의 증상인 오한, 전율, 번열이 발생했었고 24일부터 본격적인 학질치료가 시작됐는데, 26일에 소시호탕을 먹고 갑자기 증세가 위독해져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 논문에서는 처방과 치료법에 문제는 없지만 갑자기 증상이 악화된 것으로 보아 독살을 의심해보면 소시호탕을 투여한 것에 의심해볼만 합니다.
소현세자의 독살을 의심해 볼만한게 시신이 짙은 검은 빛을 띄고 있었고, 이목구비에 출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독살을 밝히기 위함 부검을 전혀 진행하지 않아 죽음이 석연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빈
강빈은 지속적으로 궁중에서 발생하는 저주 관련 사건에 휘말리다가 마침내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사사되었고, 아들들도 여기에 연루되어서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빈이 휩쓸린 저주 관련 사건은 애매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궁녀가 연루되어 장살당했던 참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세자빈 강씨를 제거하고 원손을 궁지에 몰기 위해서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소용조씨가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인조는 1646년 1월 초에 자신의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핑계를 들어 강빈의 궁녀 세 명과 주방 궁녀 두 명을 내사옥에 내려 환관들에게 고문하게 했고 강빈 역시 혐의가 있다면서 후원 별당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에도 궁녀들에겐 별다른 자백이 나오지 않았고 15일이 지난 후에 의관을 불러 자기 음식물에 중독된 듯한 증상이 있다면서 해독제를 복용합니다. 대신들을 불러서 이렇게 음식에 독을 탄 주동자는 강빈일 것이라고 처벌하는 일을 논의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강빈이 참란한 행동을 하고 강빈을 중전이라고 불렀던 향관들을 의금부에 불러서 죄를 묻게 하였습니다.
인조실록에서 강빈이 독을 넣ᄋᅠᆻ다고 의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문초하는 과정에서 강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인조는 끝까지 강빈을 의심했습니다. 중전에 곡식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인조의 말에 대신 이시백은 그것은 원래 부인들이 비단을 탐내는 성품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왕위를 탈취해 중전이 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라고 두둔합니다. 그리고 강빈의 형제들인 강문성, 강문명 등을 체포하게 하면서 일이 심각해지니까 대신들은 강빈을 구하기 위해서 간증했지만 아랑곳않고 2월 12일에 강빈을 퇴출합니다. 그리고 강빈을 마침내 사사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얽혀있었지만, 인조가 강빈을 곱게 보지 않았던 점, 강빈 스스로 자초한 부분이 복합적으로 발동해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강빈은 심양에서 가져온 비단과 보화를 써서 궁중의 궁녀들을 움직이기도 했고 무당을 궐내에 불러들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궁녀들이 잡혀가서 국문을 받을 때 인조의 처소 가ᄁᆞ이 가서 울부짖어서 인조를 화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강빈을 미워하던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강빈과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걸림돌이었습니다. 새롭게 세자가 정해졌지만 여전히 소현세자를 동정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런 것들은 장차 인조나 봉림대군에게 나쁜 혐의로 지적될 수 있었습니다.
효종도 효종실록에서 강빈을 역강, 즉 역적 강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윗사람인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죽인 무조와 비교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소현세자를 쥐락펴락했고 병이 났을 때 의원이 아픈 이유가 조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아픈 이유가 잠자리를 너무 가져서라고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소리에 강빈이 싫어서 이 사실을 숨기고 이후에 소현세자가 죽고 난 후에 자기 복 중에 있던 유복자마저 살해해 아픈 소현세자와 잠자리를 가졌던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심양에서의 생활, 소현세자의 죽음이 모두 강빈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현세자는 주도적이지 못하고 유약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석연치 않던 죽음을 맞이한 강빈은 숙종 43년(1717년)에 신원이 되었고 이후에 민회라는 시호가 내려져서 이후에 민회빈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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