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영조의 관심을 받은 정조의 어린 시절
정조가 어린 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있는데, 5~6살 즈음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글로 되어있는 것이 인상적이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어른스럽습니다.
영조는 보양청에 있는 단계에서부터 정조 왕세손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57년에 6살의 어린 원손을 불러 학습진도를 점검하였습니다. 정조가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의젓하고 뛰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조가 원손을 교육하는 데 있어 굉장히 신경 썼다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원손을 가르치는 남유용에게 특별히 신경쓸 것을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영조 34년에도 원손이 입시했을 때 영조가 소학을 외우게 했는데 이 때도 잘 외어서 영조가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조 36년에 왕세손에게 소학을 강하도록 명하고 영조가 세손에게 단어를 물어보고 대답을 잘하자 원손에게 더 경계를 늦추지 말고 열심히 할 것을 독려합니다.
정조는 영조 35년(1759년)에 왕세손에 책봉이 되었고, 생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세손의 나이가 11살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정조는 성장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를 앞서 요절했던 영조 자신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아서 왕통을 잇게 하였습니다. 사실여부는 어찌 되었건 사도세자가 불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인 정조에게는 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통을 바꾼다 해서 사도세자와 정조의 부자 관계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허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왕세손을 친부인 사도세자의 후사가 아닌 죽은 장자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두어서 대통을 이을 왕세손의 정통을 정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왕세손에게도 다짐을 받았는데 영조는 세손에게 이후에 여러 신하가 혹시 이 일들을 거론한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그른 일이겠느냐 물어보았는데 세손은 그른 것이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영조는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군자겠느냐 소인이겠느냐 물어봤는데 세손은 소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문답은 왕세손에게 자기 입지를 각인시키게 했고, 또는 사관에서 이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게 해서 어재문을 써서 보관하라고 명합니다. 이러한 영조의 뜻을 그대로 받들어서 정조는 효장세자의 후자로서 정통을 계승하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조 52년에 대리청정을 할 것을 왕세손이 명령받았는데, 이 때에도 임오화변은 왕께서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 마지못해 하신 일이고 보편적인 권도를 실천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리청정 했던 것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과 제스처는 영조에게 왕세손인 정조가 이전에 했던 약조가 아직 굳건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세손은 영조 말년에 국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손이 대리청정하는 것이 결정될 당시에 홍인한이 삼불필지설을 제기해서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이 있습니다. 노론세력은 정조의 어머니 해경궁 홍씨의 세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조의 즉위가 두렵기도 했던 것입니다.
직위
그리고 이듬해에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가 25살에 왕위에 오릅니다. 비록 정조가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 과정이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서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졌고, 정후경 등의 여러 사람들이 정조를 헤치려고 했고, 비방하는 내용의 투서가 있거나, 아니면 머무르던 거처에 괴한이 들어서 염탐하는 사건도 이어집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낸 정조는 개혁군주이자 위민군주로 현대에 평가받고 있는데 실제로 재위하는 24년간 왕도정치의 구현과 여러 가지 일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정조가 즉위한지 2년째 되었을 때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 라는 경장대고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재위기간 내에 노력하였습니다.
정조는 타고난 지적, 통치 능력으로 국정의 모든 것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은 학술적인 방면, 정치제도적인 방면, 모든 방면을 망라합니다. 죽을 뻔한 기억, 아버지를 잃은 기억, 여러가지 나쁜 기억들로 인해 굉장히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형성되었고, 다른사람에게 결코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었고, 그리고 모든 시스템을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고 훤히 꿰뚫으려고 하는 그러한 완벽주의적인 모습이 정조실록이나 다른 여러 기록에서 굉장히 훤히 보였습니다.
정조는 사람을 가장 중요히 여긴다는 어록이 있는데, 생명을 중요하게 여긴다거나 사람 외에 미물들은 사람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런 것들은 사서 3경에 있던 줄거리를 본다면 그 맥락들을 담고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정조 자신이 몸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어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정조는 생활을 할 때도 말을 한마디 하거나 움직임을 보일 때도 하나하나 계획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왕비가 있고, 후궁을 2명을 두었습니다. 홍재전서에서도 자신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부친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재위하지 않았지만 왕으로 추숭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 자신은 영조와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어 이 일을 직접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자기가 직접하지 않고 자기의 후계자인 세자가 이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조는 세자가 성인이 되는 1804년쯤에 왕위에서 물러나서 상왕이 되려고 합니다. 정조 자신은 사도세자를 추숭해 줄 수 없지만, 세자라면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왕위와 사도세자의 추숭을 맞바꾸려고 했던 것입니다.
창덕궁 개방
정조가 이전 왕들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창덕궁의 내원을 특별하게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내원의 공간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굉장히 이례적으로 개방했습니다. 내원의 초입인 영화당은 국왕이 안정을 취하는 휴식을 취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창덕궁 내에 가장 깊은 공간인 옥류천 주변도 국왕이 종친이나 2품 이상의 관원들과도 연회를 베풀거나 이러지 않는 국왕만의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국왕의 전유물이었던 공간을 신하들에게 개방하고 이들과 함께 산책하고 군신이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선 역사상 전례가 없는 옥류천까지 개방하는 일은 굉장히 파격적이어서 신하들은 굉장히 기뻐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조의 배려는 정조와 함께 걸었던 옥류천 산책이나 연회 같은 것을 기억하면서 정조를 지지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조는 신하들을 회유하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에 있어 공간적인 요소도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규장각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서 인재를 육성하고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학문의 깊이를 정치적인 제도 구축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정조 자신의 정치적인 적들을 제거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정조는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던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들의 친필서적이나 이런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당시에 왕권을 위태롭게 했던 세력들의 횡포를 눌러버리고 여러 가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도서들을 수집하고 책을 출판, 간행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색을 초월해서 학식이 높은 사람들을 모아서 우대했습니다. 이러한 우대정책을 통해서 자신의 친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규장각 내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서 서얼 신분이었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같은 사람도 등용합니다. 이 사람들은 북학파의 대표적인 박지원의 제자들입니다.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에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정조를 만나면서 기회를 제공받고 사회적 소통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초계문신제도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경연을 통해서 신하들에게 학습을 받거나 아니면 대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는 입장이었다면, 정조는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의 연속선상에 있던 것이 초계문신제도였다 할 수 있습니다. 초계문신은 규장각에 소속되어서 3년 정도 재교육 과정을 받던 37살 이하의 젊은 문신들을 의미합니다. 초계문신 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습니다.
교육과정은 강독을 하는 과강, 제술시험을 보는 과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과강은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로 두 번 이루어졌고, 과제는 20일 이후에 한 번 실시되었습니다. 정조가 직접 교육하는 친강은 매달 20일 경에 적당한 날을 잡아서 거행합니다. 국왕이 직접 시험을 보는 친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매달 초 하루에 시행되었습니다. 한달에 굉장히 많은 시험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빡세게 학문을 독려하고 인간적인 접촉을 시도했고, 정조가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함과 동시에 굉장히 두뇌가 뛰어난 사람으로 기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1년 중에 가장 추운시기와 더운시기에는 집에 가서 글을 지어서 바치는 규정을 두어서 어느정도 배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초계문신을 지냈던 정약용같은 경우에는 이 제도에 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을 남겼습니다. 37살 이하의 문신들인데, 이것은 정약용이 나이 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재교육 하는 건 정말 너무하다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화성 건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게 됩니다. 화성은 정조 자신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는 것을 계기로 조성했던 성인데, 정조는 이 성을 단순히 군사적인 기능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여러 가지 개혁의 성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았습니다. 축성을 하는 과정에서 당시로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기술을 사용했고, 자신이 육성했던 측근세력들(정약용 포함)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성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 이것은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머물면서 움직이려는 공간을 만들어 상왕정치의 영역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성이 구획되는 과정에서 제도개혁에 설계했던 것을 굉장히 많이 시험합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화성으로 행차했을 때 굉장히 응축되어서 나타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탕평정치
정조는 영조를 이어서 탕평정치를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정조는 붕당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인위적으로 타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조대의 경험을 통해서 붕당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탕평파같은 새로운 당을 탄생시키는 것일 뿐,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조대에는 초반부터 후반까지 일관되게 붕당 단위의 정치가 활발히 전개됩니다. 정조는 노론소론남인의 원칙론자들인 준론청론을 중용하였지만 그렇다고 완론세력들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정조의 정국 운영을 기준으로 시파와 벽파로 나누어지기도 했지만 정조 때에는 정국운영 방향에 따라서 이들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등용해서 균형을 잡아갔습니다. 정조의 탕평책은 여러 붕당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해줬고,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주면서 정조 특유의 탕평이 만들어졌습니다.
장용영
정조 때에는 다양한 서적들이 간행되었고, 정조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도 창설되었습니다. 내영과 외영이 있었는데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통공정책이 있었는데 금난전권의 혁파와 난전상인의 안정을 목표로 한 상업정책이었습니다. 기존에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던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켰던 정책이었습니다.
정조는 매우 뛰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조 시대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정조의 여러 정책과 업적들로 그것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 칭찬과 긍정적인 의견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날선 비판과 냉정한 시선으로 사실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조는 탕평군주의 이미지이지만 그것은 18세기 조선의 현실에서 도출된 지극히 현실적인 개혁이었다던가, 정조가 신분제 철폐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졌었지만 알고 보니 신분제 자체를 철폐하려는 문제의식은 없었다던가, 정조가 반주자학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정조는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을 굉장히 존숭했던 철저한 주자학자였다던가 등등 긍정적인 이미지에 사실이 가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한 연구에서는 정조 이후에 순조 때부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여러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모든 위기를 가져온 것이 정조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국왕과 대신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장치인 붕당을 통해서 새로운 인재를 충원하면서 상호 간에 견제와 균형이 작동했던 것이 조선 특유의 정치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대에 이것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합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인사청문회 같은 기능을 수행해서 부패를 방지했던 공문정치라는 조선 특유의 정치방식이 조선말기에 삼정문란같이 사회적 부패까지 이루어 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정치체계를 지탱해왔던 요소들이 제거되면서 오히려 조선 왕조를 붕괴시키는 나쁜 결과를 야기했다고 엄밀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인정할 건 인정하되 시대적 조건을 따지면서, 긍정적인 이미지에 비판할만한 내용을 덮지 않아야 하고, 잘못된 사실도 바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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