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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한국사

[ 한국사 ] 조선후기 천주교 전파 과정

by 신인용 202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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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주교 전파 과정

 

 

 

 서양 중세 특히 유럽을 풍미했던 가톨릭신앙은 신 중심, 내세주의, 보편성의 사상이 지배하던 서양 사상에서 르네상스기를 거쳐서 인간중심, 현세주의, 개별성의 사상이 시대 사조가 되는 근대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동요가 일으킵니다. 이것으로 종교적인 개별주의를 표방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유럽 가톨릭교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개신교 운동에 대해서 가톨릭교에서는 자체 개혁과 교세 회복을 위해서 반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교단이 예수회였는데, 1534년에 창립된 예수회는 교회 정화와 교세 확대를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선교를 위해서 해외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해외로 선교를 떠나는데 예수의 동방선교에 나선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1542년에 인도, 1549년에 일본 키리시탄 교회를 세우고 가톨릭 신앙을 심어놓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땅에 예수회의 선교사가 처음으로 마카오에 도달했던 것은 1557년인데, 명나라에서 정식으로 예수회 회원들이 북경에 거주하게 해주고 선교 활동을 묵인하게 된 것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나라 황제 신종의 윤호를 얻어서 북경에 입주했던 1601년이었습니다.

 일본의 키리시탄 교회는 일본의 내란시대를 거치고 착실히 교세를 늘려가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 시대에도 35만의 교인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중국 교회도 명청 교체기를 잘 넘기면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의 보호 아래 교세를 늘려갑니다.

 명나라 청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예수회의 신부들이 조선에 와서도 선교활동을 하려고 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몇몇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반도에 교회를 창설하는 일까지 진행되지 못했었습니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에 천주신앙이 수용이 되고 교회신앙이 생겨난 것은 정조 8(1784)으로 보아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임진왜란 때 그리스도교 신자가 생겨났고 천주당도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조선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수용한 일이 밖에서부터 선교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통사회의 유교 지식인들이 천주교서를 연구하면서 천주신앙을 깨우치고 신앙 공동체를 조직해서 자생적으로 교회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되는 특수성을 지닙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국 북경에서 접하게 되었던 것이고, 천주교서를 연구하게 된 것은 진취적인 성향을 지녔던 일부 유교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천주교 선교에 종사했던 신부들은 그들이 선교 대상지인 유교 문화권이 굉장히 높은 문화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세계라는 것을 알고는, 문화주의적인 선교방식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방식이 중국 사회의 그리스도에서 발생했던 여러 서양문명들을 전파하는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발생한 여러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을 해서 전파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서학서입니다. 당시에 여러 서양 문명들은 정신적인 문명이거나 물질적인 과학문명이거나 모두 그리스도적인 가치체계 안에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신앙과 그리스도적인 윤리 사상을 담고 있어서 이것을 먼저 전파하면서, 문명에 대한 것을 먼저 전파하고 그 다음에 신앙적인 것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 신부들의 전략입니다.

 북경에 전파되어서 중국인들이 가까이하고 있었던 중국의 서학서들을 조선인들도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됩니다. 선진적인 천문 역산술이 도입되면서 그것들에 관심이 있었던 조선의 기술 관료들은 북경에서 서양 성직자와 만나게 되었고, 북학의식을 가지고 북경에서 서학서를 보고 서학서를 가지고 온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노력한 북학자들 역시 중국에서 서학을 접하게 됩니다.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인들은 북경에 있는 천주당과 흠천감에 방문해서 여러 성직자와 만났고 자연스럽게 서양의 문물들은 물론이고 서양의 천주교를 전파하게 되었고 천주교서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만남은 17세기 초부터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북경에 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한문으로 번역된 여러 서학서라던지 천주교서들이 조선으로 점차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입되었던 것이 천주실의, 칠극, 영언여약 등 이런 서적들입니다.

 이렇게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서학서들은 조선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매우 충분했습니다. 북경에서 처음 접하게 된 것들은 조선에서 전파가 되기 시작했고, 이 전파는 처음에는 지식에 대한 접근으로 호기심으로 접근이 이루어지다가 점차 그리스도적인 가치체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홍대용 같은 경우에는 영조 41년에 군관신분으로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당을 관람했고 흠천감을 방문해서 여러 신부들과 만나서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문답을 나눴던 바 있습니다. 문답기록의 내용을 보면 홍대용이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의 종교나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주학에 관해서는 조금 물어보고 나머지는 전부 과학기술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대용은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담헌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양의 학은 유교의 상제의 이름을 도적질해다가 불교의 윤회라는 말로 치장하였으니 천박하고 좁은 것이며 가소롭다. 그런데도 중국에 와서 보니 이를 숭상하는 자가 많다.”

 홍양호 같은 경우에도 북경에 갔을 때 청국에 유명한 학자 기효람과 서신을 왕래하면서 천주교학에 대해서는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입장을 보여주었습니다. 홍양호의 이계집을 살펴보면 이러한 입장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박지원 같은 경우에도 북경에서 유명한 청나라 학자 곡정과 천주학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은 바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천주교에서 불교의 윤회성과 천당지옥설을 믿으면서도 불교를 헐뜯고 물리쳐 원수와 같이 여기는 것을 비난합니다. 박지원은 천주학이 내세우는 것은 그럴싸하지만 하늘을 속이고 인간을 그릇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만 천문역사를 하는 것에는 능통해서 서양과학 기술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은 인정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박제가는 천당과 지옥을 깊이 믿는 것은 불교와 다른 바는 없고 그렇지만 천주교가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실천의 방도를 가지고 있어서 불교보다는 생산성이 있다고 이해함.

 이렇게 보면 북학을 숭상헀던 사람들은 북경에 가서 직접 서학을 체험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 놀라워하고 우수하게 여겼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대부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초반부터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인 사행원들에게 서학서를 건네주었던 데에는 예수회 성직자들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천주학서를 전해주면서 유교적인 세계인 조선사회에 그리스도 복음이 침투되기를 바라면서 서학서를 전해주고 홍보했던 것입니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학서를 접하고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 깨우침을 가지고 있었던 트여있는 지식인들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접하고 흥미를 가지는 것에는 열려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것에 굉장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저변에 깔려있는 그리스도에 깔려있는 종교적인, 윤리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서학서들을 열심히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학자들의 여러 문집들을 살펴보면은 간단하게라도 천주교라던지 천주학에 대해서 논평을 하거나 자기 의견을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호 이익 같은 경우에도 천주실의를 읽고 이 학문이 오로지 천주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이다 이렇게 이해하면서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의견을 간단하게 남긴 바 있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서학서를 탐독하는 것이 활발하게 확장이 되어갔고 이 유교지식인들은 유교지식을 바탕으로 천주교와 서학을 이해하는 보유론적인 천주신앙을 자율적으로 깨우치는 방향으로 발전해갑니다.

 

 성호 이익 이전에도 천주학이라던지 천주교에 대해서 나름대로 소화한 내용들을 자기가 표현하거나 모여서 공동으로 토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유학자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어떤 장소에 모여서 토의하는 모임인 강학회라는 게 있었습니다.

 정조 3년 경에 주어사와 천진암에 모여서 권철신, 정약전 등등이 모여서 유교 경전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하고 천주교나 서학서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벽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천주교서의 내용에 대해서 집중하고 토론한 결과 천주교가 이단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신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모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진 것이 강학회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천주교에 대해서 이해가 쌓여왔었고 그러한 선학들의 이해가 쌓이고 이런 천진암 주어사 모임에서 이들이 천주학에 대해서 모여서 토론해서 결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고 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천주교를 수용하게 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유교철학의 가르침을 보다 확장해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학을 보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주학을 이해했습니다. 보유론적인 창조신앙을 자율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계 신앙인이라도 불릴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언제부터 천주교 신앙인들이 생겼는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영조 말년 경 홍유한이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생활을 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조 3년 경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신앙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계율을 자기 생활 속에 녹여내려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천주교의 신앙인이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 모임도 천주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천주교회의 시작은 한국에서 이승훈이 북경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되어서 귀국했던 정조 8년에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입교절차를 취해주면서 이때부터 정식 교인이 생겨났다고 보고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명래동에 있던 중인계열인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이 시기를 서울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생겨난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국의 천주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한국의 천주교 발생과 정립에 대해서 다른 나라와 가지는 몇가지 특수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선교를 하는 신부나 성직자들이 조선의 입국하는 활동이 없이 유교지식인들이 스스로 서학을 탐구하다가 자연스럽게 천주신앙과 접근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학구적 검토를 통해 유교를 중심으로 천주교에 대해 접근하다가 깨달음이 커져서 교회를 창립하는 것까지 이어졌습니다.

 또 유교 지식인들이 자율적인 신앙생활. 책으로만 보고 천주교적인 규율을 스스로 지켜가면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식신앙인이 없이 미사 같은 어떤 의례절차도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교회공동체를 만들었었습니다.

 

 조선 초기 천주교회는 비록 성직자가 없는 신자들만 있는 임시적인 교회 형식이었지만 이벽을 비롯한 여러 평신도 지도자들이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에 급속하게 신도 수가 늘어납니다. 이것이 지역적으로 서울뿐 아니라 충천도 전라도 지방으로도 그리스도 공동체가 생겨나게 됩니다. 다른 지방에 생긴 최초의 신앙공동체는 이존창이 창설한 내포교회였고, 이어서 유항검이 창설한 전주교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양민이었던 이존창과 유복한 양반이었던 유항검이 서울의 공동체에 창설을 하고 상경을 해서 입교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들과 자기 동네 주민들을 입교를 시켜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만 초기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시련을 면치 못합니다. 처음 발생했던 것은 정조 9년에 발생한 추조적발사건입니다. 추조라는 것은 이호예병형공 할 때 형 조의 별칭입니다.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공동체의 활동을 하고 있던 것을 형 조의 관원들이 적발하게 되면서 기밀로 이뤄졌던 한국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 설득을 하고 각 집안에서 종교를 배반하라고 강요하라는 합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승훈이나 이벽 같은 초기교회 지도자들이 교회활동을 멀리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북경에서 수입했던 한역 서학서를 도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던 천주교서를 불태워버립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서학이라고 불리었던 것이 사학. 사특한 학문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조 11년에 발생했던 반회사건 역시 교회공동체의 시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승훈, 정약용 등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모여서 성균관 근처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가 같은 남인계열 유생이었던 이기경에게 발각되어 폭로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학은 조정에서 중점적인 문제로 논의가 됩니다.

 이렇게 거듭되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는 탄생 이후에 10년 만인 정조 18년에 이르러서는 신도가 4000명으로 늘어납니다. 서울, 충청도, 전라도 각지에서 천주교인들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세가 전국적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굉장히 열심히 전도를 했던 것이 큰 요인이었고, 그리고 비밀리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해 알려주고 천주교 가사를 지어서 서민들한테 노래로 유포시켰던 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서학서가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일부를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나라에 유포했었는데, 이것도 교세가 확장되는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간추린 천주교서가 대표적인게 정약종이 정리했던 주교요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초기 교회가 급속하게 자라고 확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문으로 쓰여져 있던 천주교서들을 연구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깨우쳐서 교회까지 창설하기까지 과정을 본다면은 교회창설의 주요 역할을 했던 교인들은 주로 한문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유학자들, 유학 지식인들이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 먼저 접할 수 있었을 것이고 확장도 그 분들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의 창설, 종교활동, 교세확장에 이르기까지 초반에는 거의 양반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양반들만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중인층들도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 가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중인층의 두드러진 인물은 역관 출신이었던 김범우, 최인길, 최찬현 같은 사람이 있고, 의관 출신이었던 최필공, 최필제, 김종교 등도 주요인물로 활동했었습니다.

 의관과 역관 계열의 기술적 중인들은 사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어느정도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나름대로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학문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유교 성리학적인 체계들에 대한 제약이 유학자들에 비해서 덜 했기 때문에 개방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었고 어떤 새로운 문물들, 이질적인 가치에 접근하는데 자유로운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천주교 수용에 있어 진취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와 조선의 유교사회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진산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산사건은 정조 15년에 전라도에 사는 천주교도였던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폐지했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는 위패를 불태우고 상례를 치르지 않았고, 외종사촌형 권상연도 숙모의 사망에 대해 같은 행동을 취함으로써 야기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풍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이 때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고 재를 뒤뜰에 묻었다던지 문상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던지 문상객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이 풍문으로 퍼진 것. 그런데 윤지충은 권상연과 상의를 해서 조선에서 시행하던 유교적인 장례절차를 따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상례는 정성껏 치렀고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보고도 했고 문상객이 왔을 때도 예를 다했음. 다만 신주를 모신다거나 절하는 의식. 유교적인 절차를 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절차를 쓰지 않았기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그런 소문이 외부에 퍼지니까 문상객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문상을 오는 사람이 있어도 다소 마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윤지충은 정성껏 상례를 치르긴 했지만 유교적인 규율에 따라서 신주를 모시거나 여러가지 절차를 따르지 않고 간단하게 상례를 치뤘다는게 문제가 되었고 이것은 소문으로 이상하게 양산이 되고,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천주교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정조 15년에 사헌부가 상소한 내용을 보면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산사건을 바라보는 당시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연전에 조정에서 엄히 금지시킨 뒤에" 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은 추조적발사건과 반회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미 천주교를 이단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조정에서 엄금했던 적이 있는데도 천주교가 확장되고 있는 것을 문제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확산이 돼서 민심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이렇게 천주교가 이전에 사학으로 규정이 되었었는데 지금에 와서 문제삼는 정도가 훨씬 심해졌습니다. 어느정도 위기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진산사건을 통해서 한 번 더 엿볼 수 있습니다.

 사간원에서도 상소문을 올렸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내력 있는 집안인 권상연과 윤지충이 요망한 학술을 주장하고 유교를 배반한 것이 가증스럽다는 내용이 있고, 신주를 멋대로 불태워버리고 부모를 잘 모시지 않았다, 시신을 내팽겨치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하고 벌줘야 한다는 것까지 얘기합니다.

 사간원의 상소로 다시금 진산사건에 대한 정밀조사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정조는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정민시를 시켜서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합니다. 정민시는 정조가 아끼는 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진산에서는 사태가 심화되어 갔던 것을 알고 있어서 군수였던 신사원이 윤지충의 집으로 찾아가서 사당에 위폐가 없는지 확인했는데 정말 신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근거없이 퍼진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두 사람을 체포하려고 합니다.

 신사원이라는 군수는 천주교를 배척하려 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윤지충 가문을 적대시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윤지충 가문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빠르게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조정에 올립니다. 신사원이 체포령을 내렸는데 이전에 이미 윤지충과 권상연이 피신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체포하러 갔는데 없으니까 신사원이 이 사람의 숙부를 잡습니다. 숙부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관아에 출두를 했고, 신문을 받게 됩니다.

 전라도 관찰사로 정민시가 보고했던 내용을 보면, 윤지충은 정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한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을 보고 빌려서 고향에 내려와서 필사를 하고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절대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 된다고 얘기합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신주를 모시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일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다는 자기 입장을 피력하면서 신주를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서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일이고 서민들 같은 경우에는 신주를 세우지 않아도 나라에서 벌을 주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곤궁한 입장의 선비니까 신주를 세우지 않고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천주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나라의 법을 어길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그리고 권상연 같은 경우에는 집 안에 신주를 묻으려다가 남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불태우고 재를 무덤 앞에 묻었다고 얘기합니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생략했을 뿐이지 상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유교적인 절차를 벗어나 있어 죄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들은 유교사회의 조선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유교문화권에서 상례와 재례는 효를 표현하는 핵심적인 의례입니다. 천주교가 도입되고 확산 되는 과정에서 몇가지 의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었습니다. 논쟁 중에 하나가 조상 제사의 허용여부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동양선교에 적극적이었던 유럽에서도 굉장히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100년 정도 논쟁 끝에 17153월에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칙서를 통해 이 논쟁을 확정 지었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미신적 요소를 내포하므로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교황의 결정은 큰 혼란과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진산사건은 이런 제사나 상장례문제가 사건의 핵심요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 전례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은 전통이라는 것과 충돌하면서 문제가 됩니다. 제사를 금지하는 것, 특히 양반 사대부가 제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양반이라는 사대부라는 신분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될 정도로 큰 의미입니다. 거의 양반 신분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전라도 지방에서 발생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까지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하늘이 부모를 주셨고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하늘과 함께 부모를 공경하고 제사를 드리는 총체적인 풍속은 효의 시작과 끝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모습들이고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런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중이 교황이 확정 지은 이후 존중이 사라졌기 때문에 진산사건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거나 묻어버린 것을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신주라는 것은 사람이 사망하고 혼과 백이 분리가 된 후에 망자의 혼이 신주에 들어와서 의지하고 있는, 혼령이 매개로 삼고 있는 것이 신주였습니다. 혼이 담겨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주에 부모의 혼이 깃들고 있는 것이 당시의 문화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지충은 이 신주에 대해서 천주교를 익히면서 본인이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자기 입장을 피력했지만 유교문화에 이미 빠져있는 사람들은 이는 대해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윤지충의 행동은 효를 져버린 행위로 간주되게 됩니다.

 

 진산사건이 가지는 또다른 의미는 정치적인 부분을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인에 대한 견제가 진산사건을 더 크게 키웠던 것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남인계열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는지를 혈연을 따라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윤선도는 남인계 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윤두서라는 당대의 명망 높았던 선비도 윤지충의 증조부였습니다. 윤지충은 남인 명문계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집안 자손입니다. 진산사건뿐 아니라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던 여러 사건들과 관련된 인물들도 따져본다면 윤지충과 가족, 친척관계에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윤지충의 고모는 정약용의 어머니입니다. 천주교의 중요한 인물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 황사영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입니다.

 혈연이나 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따져본다면, 진산사건을 비화시키고 확장시킨다면 정계에 있었던 남인계열 세력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고 정점에 있었던 남인계열의 영수였던 채제공에게까지 혐의를 입힐 수 있는 사건이 진산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종교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건을 계속 비화시키려는 다른 목적들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이 사건에 대한 태도는 온건한 방식이었는데 이것은 정조가 진산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왜 확장되려고 했는지 정조가 이미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앞서 있었던 추조사건이나 반회사건이나 진산사건이나 남인을 공격하기 위해 계속 비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고 적절히 자기가 믿는 측근을 보내서 정리해버리려는 방식으로 처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처분함에 있어서 신중한 입장을 보입니다. 서학에 대해서 온건하게 대처하고 한역서학서를 소각하라 하고 처벌도 지나친 처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온건한 처벌을 하면서 대다수의 인물이 배교할 수 있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정조의 온화한 사건처리방식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정학을 바로잡는다는 인식을 우선으로 해서 사건을 정리한 것이 정조의 방식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윤지충, 권상연은 사형을 당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감화시키고 교화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했습니다. 정조가 택했던 방법은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감화시키는 것, 두번째는 형벌하는 것, 세번째는 처형하는 것입니다.

 참수를 당한 인물 외에는 대부분 목숨을 유지했고 상당한 사람들이 배교를 할 수 있게 방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윤지충이나 권상연같이 제사를 아예 없앤 양반들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서학을 연구하다가 입교한 관료 지식인 계층, 유학자들은 유교와의 조화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조선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긴 했지만 전통과 맞서면서 정치적 위험까지 감수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상당수의 양반 관료들이 배교를 하게 됩니다.

 진산사건 이후 순종 때에 1801년에 신유박해 때에는 제사를 폐지하거나 제사 참여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다수 드러났습니다. 이 때 제사를 폐지하고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양반들은 조선사회 안에서 양반신분이기는 하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했거나 가난했거나 적극적이지 않은 양반이 상당수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믿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산사건 이후에도 세례를 받고 입교를 했었고 이후에 중국에서 오는 신부하고도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한 몇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유교의 핵심인 조상제사를 폐지하는 것이나 적극적인 방향까지는 안 갔고 대다수가 배교하였습니다. 정약용이나 이승훈 같은 경우도 부정하고 배교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진산사건을 신해박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후에 발생했던 천주교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진산사건은 매우 온건하게 정리됐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는 굉장히 큰 동요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첫째로, 신앙적인 측면에 있어서 보유론적인 천주신앙이라는 개념이 이제 제대로 작용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천주교를 신봉했던 사람들 중에 유교적인 풍속을 지속적으로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조선사회와 그리스 신화를 근본으로 삼는 천주교에서는 제사라던지 유교적인 의례를 폐지해야한다는 천주교 신앙의 입장. 이 두가지 입장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두가지를 병행할 수 있었지만 한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을 때는 대다수가 배교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둘째로, 유교적인 풍속과 천주교적인 풍속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초기에 천주교 신앙을 따르고 있었던 양반 지식인층, 유학자층의 교인들 대다수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지도자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들도 조상제사를 금지했던 일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고, 천주교를 이탈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교적인 풍속이나 제도나 룰에서 자유로운 입장이었던 중인층의 신자들, 그리고 서민들, 부녀자층은 새롭게 한 흐름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중인층 신자들이 교회의 새로운 지도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부녀자층도 활발하게 가입합니다. 양반들이 이탈하고 중인층, 서인층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교회의 성격이 변하고 강화하게 됩니다.

 셋째로, 신자들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내세관이라던지 천국에 대한 것들을 중시하면서 현세와 세속사회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좀 더 뚜렷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측면을 본다면 신앙과 어떤 사회, 국가와 교회 이런 것들에 대해 반목이 좀 더 강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게 되면서 천주교에 대해 박해하는 분위기가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초창기 교회에서는 서민들이 많지 않았는데 점차 서얼이나 전주쪽 신앙공동체가 세워지고 교회지도자들이 열성적으로 전도를 하면서 서민층도 점차 늘어났고, 천주신앙에서 표방하는게 만민의 평등과 사랑, 나눔 그리고 내세의 천국이라는 영광이라는 분명한 교리 같은 것들은 서민 대중들에게 강렬하고 신선했을 것입니다. 조선사회에서 천대받거나 무시받거나 존재가치가 뚜렷하지 않았던 부녀자층도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었는데, 부녀자들과 서민들은 사랑과 평화를 표방하는 천주교를 통해서 현세에서 얻지 못한 것들을 내세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면서 천주교를 수용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탈이라던지 천대가 심해지고 가혹해졌던 세도정치 시기로 이행되면서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고 좀 더 열심히 신앙을 지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미사를 하는 것을 중심으로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미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성직자였는데, 성직자는 천주교회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였습니다. 영적으로 구원하는 인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선에는 성직자가 직접 오지 않았었고, 스스로 공부헀던 것을 바탕으로 보유론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깨우쳐서 교회를 임시적으로 만들고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이끌어왔던 것이기에 초기 교회 공동체들의 지도자들은 성직제도에 대한 교리적 이행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시 성직자 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다가 조선 교회가 윤유일이라는 사람을 북경에 파견해서 조선교인들을 위해 적합한 성직자를 파송해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북경 주교가 배려해주어서 정조 19년 초쯤에 조선천주교회를 위해서 최초로 주문모 신부가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신자들로만 이루어졌던 교회공동체가 성직자와 신자들로 구성된 정식 교회의 형식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주문모 신부는 역관 출신 교인이었던 최인길의 집에서 은신하면서 비밀스럽게 활동하다가 발각돼서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는 일이 일어난 이후에는 교인들이 대책을 세워서 양반 여성 교인이었던 강완숙 집에 은신하면서 활동하게 됩니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활동을 하였고,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기까지 6년동안 조선교회를 인도하면서 성무를 담당합니다.

 주문모 신부는 은신하면서 교회활동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교회 조직을 체계적으로 만들었는데 신자 조직을 총회장을 두고, 회장을 두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여성회장도 있었습니다. 폐쇄적인 유교사회에서 여성 교인으로서의 수장도 세우면서 신앙생활을 관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와 신자들의 교리학습을 위해서 비밀조직이었던 명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회장 정약종, 하부조직으로 몇몇 교인들을 세워서 점조직으로 육회라는 것을 두어서 교인들의 활동을 관리하게 합니다.

 정부에게 굉장히 천주교에 대해서 안 좋게 여기고 있었고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교회의 생활과 전도활동을 유지해 갔었는데, 육회의 비밀집회 장소로는 의학계 중인 출신들의 약방이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는 한글로 된 교리서를 제작해서 교육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이 때 나온 것 중에 유명한게 정약종이 만든 주교요지입니다.

 

 천주교라는 것이 조선후기에 수용되었다는 것은 종교사적으로 하나의 신앙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생활 전면에 영향을 주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교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사상적인 위험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의 위치에 도전하는 위험으로 비칠 수 있었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사상적, 사회적 위험이라고만 보기 어려웠던 게 정치적인 영역과 대외적인 영역하고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3대 박해라고 불리는 1801년 순조 때에 신유박해 같은 경우에는 정조 때에 정국에 대한 반동과 이 때 주요정치세력들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남인들을 제거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진행이 되었었고, 진산사건 때 살아남았거나 혹은 천주교에 연루되었었지만 혐의에서 벗어났었던 남인들을 대거 처형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격인 교인들을 희생시키면서 천주교의 지도계층이 중인으로 확대가 되고 서민들이 신도로 들어오는 계기들도 마련하게 되었던 다소 복잡한 일을 가진 사건이 신유박해입니다.

 그리고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는 프랑스 신부 3명을 비롯해서 54명이 순교를 했고, 신문 중에 죽은 사람이 60여명에 이른 대대적인 박해였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기해박해 역시도 순조 말년경부터 연루 되었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의 여파로 인해서 발생했었던 박해라고 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박해라고 불리는 고종 3년부터 8년까지 있었던 병인박해 같은 경우에는 천주교인 1/3이 사망했던 사건입니다. 일부 학자는 병인박해가 서구세력의 침략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자극을 받아서 강격한 위정척사운동을 꿰하고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정치적인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게 된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박해가 장기로 이어졌던 이유는 프랑스의 강화도 침공 병인양요, 흥선대원군 부친의 묘를 도굴했던 사건, 신미양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까지 연루가 되면서 천주교도들이 외적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단정지어서 철저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병인박해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어졌고, 당시 8000여명의 교인들이 사망하는 것으로 사건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렇게 거의 100년 가까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고종 13년에 개항이 이루어지는 것과 더불어 조금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게 됩니다. 고종 19년에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서 서양인들이 입국할 수 있게 보장이 되었고, 고종 23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때, 서양인들이 내지여행을 할 수 있고, 교회활동을 보장할 수 있게 하는 조약이 결졍되면서 대대적인 박해는 종식이 되었고 점차 신앙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사회로 이행하게 됩니다.

 

 한국에 천주교가 도입되었던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선교사의 활동이 없이 지식인들이 스스로 서학을 탐구하다가 천주신앙을 접하고 자생적으로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신앙의 뿌리가 내려졌다는 것이 한국 천주교 도입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산사건을 통해서 많은 지식인들, 양반 유햑자들이 배교의 길을 갔을 때 유교적인 가치체계 안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부녀자들, 천민들, 중인들이 대거 신앙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이것을 통해서 현세에서 누릴 수 없었던 평등과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면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날 때도 모진 고문이 있었음에도 배교를 하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절대 배반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천국에서 보장받는 아름다운 것들이 고문이나 죽음이라는 공포를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입니다. 신유박해 때 순교했던 궁녀인 문영인 같은 경우에는 고통스러워서 신앙을 부정하는 배교의 말을 했다가도 정신이 들면 자신이 너무 아파서 헛소리로 배교한 것이라고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천주교는 새로운 문화 수용임과 동시에 평등과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전면적으로 맞이하게 하면서 한반도에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한 일대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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